[고덕동 김종관&이경순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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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마을센터 댓글 0건 조회 555회 작성일 20-09-29 15:02본문
강동구마을지원센터가 2020년 새로운 마을살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 마을 구석구석을 탐구했던 지난해에 이어 관내에 유관기관들을 알아보는 THEMA.1 마을공동체가 자란다, 마을을 살아가는 주민공동체의 활약이 펼쳐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는 THEMA2. 마을을 움직이는 사람들, 강동의 과거에서 미래를 조망해 보는 THEMA3. 나의 살던 마을은 까지 세 가지 테마로 기획되었습니다.
매주 화요일, 여러분을 강동사랑으로 이끌 시리즈 '강동을 살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THEMA3. 나의 살던 마을은 : 마을 어르신이 살아온 강동 이야기
#18_"차고 달았던 물맛이 지금도 생각나요"
고덕동 한우물 평생지기 김종관 이경순 부부
옛날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고덕리 인근에는 가재울, 방죽말, 동자골, 동구비, 미역굴, 겨낙굴, 비석말, 바윗절 같은 이름을 가진 자연부락이 흩어져 있었다. 동구비 마을 논 한가운데 차고 달달한 물이 사시사철 솟아나는 자연 샘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한우물이라 불렀다. 우물 주변에는 김해 김씨 본관을 가진 열다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살았다. 한우물은 마을 아낙네들이 밥물을 뜨고 반찬거리를 씻고 빨래를 하고 어두운 여름 밤에는 등목을 즐기는 식수원이자 동네 사랑방이었다. 우물물로 담근 김치와 동치미는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맛있고 시원했으며 가뭄에도 마르는 때 없이 물은 항상 차고 넘쳤다. 논밭은 드물고 온통 야산었던 고덕동에 대규모 주공아파트 단지와 주택가가 들어서면서 자연부락과 함께 한우물도 사라졌다.
◐그 남자 이야기
누나와 여동생들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자란 남자는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었다. 한우물 근처에서 태어나 군대 갈 때, 결혼 후 암사동에 신접살림을 차렸을 때 말고 여태껏 이 자리를 뜬 적이 없다. 고덕동 개발이 한창이던 80년 중반 즈음, 택지를 분양받아 2층 양옥집을 올릴 때도 한우물 가까이 지었다.
한우물 마을에서 조금만 나가면 한강과 고덕산으로 이어졌고 산 하나를 건너 방죽말 한참 너머에는 게내(=고덕천)가 흘렀다. 모두 살기 어려운 시절, 남자는 고덕산에서 버섯을 채취하거나 게내에서 밤새 잡은 민물 게를 새끼로 엮어 갯물(=한강 가 모퉁이의 마을, 현재 암사동 롯데캐슬 근처)로 나가서 팔아 살림에 보탰다. 최근 아파트 재건축으로 고덕산 자락 선산에 모셨던 조상묘를 퇴촌으로 이장하기 전까지 매해 시제를 지냈고, 100년 전통의 구천국민학교(=현 상일초등학교)를 졸업한 그 남자, 김종관(69)씨는 고덕동의 원주민이자 살아있는 역사이다.
◑그 여자 이야기
25세, 꽃 같은 나이였지만 당시로는 조금 늦은 결혼이었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큰 키가 서구적인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호기심과 일, 공부 욕심이 컸던 여자는 결혼보다 세상을 더 많이 배우고 싶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인 회사에 들어가 형편이 어려운 집안을 돌보며 맏이 노릇을 야무지게 했다. 서울 금호동에서 나고 자랐고 종로구에 원적을 둔 그는 집과 회사만 오가며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전형적인 서울여자였다. 착실함을 눈여겨본 교회 장로의 중매로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고덕리 한우물 마을에 사는 남자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고덕리 한우물가 김해 김씨 종갓집 종부이자 외며느리가 된 여자는 사시사철 시제(時祭)와 일 년에 열두 번이 넘는 제사를 혼자 감당하며 시부모를 모시고 두 아이를 키웠다. 너무 힘이 들어 보따리를 싼 적도 있지만 아이들이 태어나고 다들 이렇게 사는 거라 여기며 이렁저렁 세월을 쌓다 보니 어느새 반평생이 다 지나 버렸다. 고덕동으로 시집와서 사십여 년 넘게 살고 있는 그 여자, 이경순(66)씨도 차고 시원했던 한우물의 물맛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요즘 무엇을 하면서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코로나 때문에 사람 만나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있어요. 매일 새벽 미사를 다녀와 동물들을 돌보며 남편과 주로 집에서 지냅니다. 우리 사랑이와 평화 좀 보실래요? (평화는 토끼, 사랑이는 놀랍게도 13년 된 사막거북이었다! ) 얘네들 말고 열대어도 키우고 길냥이도 챙겨요. 날 닮았는지 딸아이도 고양이랑 기니피그를 잘 키우네요. 그동안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과 인문학 공부를 하며 재미있게 지냈는데 모두 올 스톱 됐어요. 아래층 사는 친손주들, 유치원이랑 학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을 남편이랑 번갈아 하고 함께 놀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고덕동에 거주한 지는 얼마나 됐나요? 어떻게 강동과 인연을 맺게 됐죠?
▶79년 2월 17일, 결혼하면서 강동구에 들어왔어요. 당시 고덕은 사람들 사는 곳 말고 온 사방이 나무와 숲, 언덕으로 둘러싸인 산골이었죠. 인사드리러 오는데 깡깡 시골 한가운데 번듯한 ㄷ자 기와집이 시댁이더라구요.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김해 김씨 집성촌이고 고덕산 자락에는 조상들을 모신 선산이 있었어요. 도심에서만 살았던 내 눈에는 전형적인 농촌으로 보였어요.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부잣집 외아들인 줄 알고 왔는데... (웃음). 회사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하는 모습을 예쁘게 본 교회 장로 부부가 다리를 놓았는데 결혼 생각이 없던 때라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어느 날, 자기 집에 잠깐 들르라 해서 갔더니 시어머니 되실 분이 계셨어요. 단정하게 쪽을 진, 단단해 보이는 어른이었는데 우리 집에 오면 평생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설득하시더라구요. 결혼 준비가 안됐다고 하니 몸만 오면 된다고, 그러면서 결혼을 밀어붙이셨어요. 나 만나러 남편이 우리 동네로 오고 이후 사주단자가 오가고..... 인연은 인연이었는지 결혼하게 되더군요. 시댁은 유교 집안이었는데 천호동 예식장에서 목사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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